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빈 이씨 (문단 편집) === 자녀들의 불행한 삶 === 그러나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[[화평옹주]]는 21세에 첫 딸을 낳다 난산으로 [[요절#s-1|요절]]해 영조와 영빈을 상심하게 만들었다. [[혜경궁 홍씨|혜경궁]]은 화평옹주의 탈상 기간에 장남 [[의소세손]]을 낳고 속이 어떻든 영빈이 산후조리를 해줬는데, 영조에게 딸이 죽은 판에 [[의소세손|손자]] 봐서 신났다며 인정머리 없다고 욕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다. 거기다 영조의 총애는 받지 못했지만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[[화협옹주]] 역시 20세에 [[홍역]]으로 요절했다.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낳은 딸 3명은 어린 나이에 숨져 [[옹주#s-1|옹주]] 봉작(封爵 작호 봉하는 일)조차 받지 못했다. 그 중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고 성격,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내외적으로 심하게 갈등했다. 그 갈등으로 인한 중압감과 계속된 아버지의 핍박과 학대 때문에 [[정신병]]까지 발병해 입어야 할 옷을 찢는 의대증, 벼락을 무서워 하는 뇌벽증, 갑자기 발작하여 지나가는 내시를 아무 이유없이 죽이거나 궁녀들을 [[성폭행|겁탈]]을 하는 끔찍한 발작을 하는 간질 등의 기행에 이어 연쇄적 살인 같은 범죄로 발전했다. 그러던 중 세자에게 [[정조(조선)|정조]]를 비롯한 아들들이 연달아 태어나자, 영조는 아들을 건너 뛰고 당시 세손이었던 손자 [[정조(조선)|정조]]로 [[조선/왕사|후사]](後嗣)를 택하려 했다.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이후로도 계속 심해져 의대증 발작이 일어난 날 아끼던 후궁 [[경빈 박씨(장조)|경빈 박씨]]를 폭행하여 살해(때려 죽임)하고, 급기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아버지 영조([[조선/왕사|국왕]])의 시해까지 운운하기 시작했다. 그 와중에 무서웠는지 영조라는 주어는 없었지만 반드시 없애버리겠다 등으로 상대가 누구라고 다들 알 정도로 말하고 다니자[* 강력한 [[전제군주제]] 국가였던 [[조선시대]]에서 한 나라 국왕의 시해 운운은 사형당할 수 있는 역모에 해당하는 중죄이며 세자도 국왕의 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. 거기다 아들인 세자가 부왕을 언제든 담그고 말겠다 떠드는 건 [[역적]]에 불효, [[패륜]]까지 세트로 성립되는 것이고, 세자가 이러고 다닌다는 것이 알려지면 왕실의 체면 자체가 [[와르르맨션]] 감 .] 결국 영빈은 [[정조(조선)|세손]]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결심하고 울면서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달려가 울면서 낱낱이 고했다.[* 이것도 세손 정조의 보위와 정통성을 지키고 궁내의 마지막 평화라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. 당시 중전 [[정성왕후]]와 대왕대비 [[인원왕후]]가 잇달아 승하하면서 세자를 뒤에서 후원해주고 빽으로 뒷받침해주던 이들이 없어지니, 영조와 세자의 부자(父子)를 중재할 왕실 어른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총대를 맬 사람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밖에 없었다. [[사도세자]]의 광증과 범죄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영빈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, 이 선택 때문에 영빈은 여생을 자식을 간접적으로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생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만 했다.] >"세자가 내관, 내인,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명이오며 >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>차마 볼수 없는 일을 행한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. >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없이 가져다 썼습니다. >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>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, 기생,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. >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. >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, >모자(母子)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. >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>하인에게 머리를 풀게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. >지난번 제가 [[창덕궁]]에 갔을 때 몇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>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>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." >---- >- '''[[영빈 이씨]]의 고변''' 영빈의 고백 다음날 영조는 아버지 [[숙종(조선)|숙종]]의 어진이 있는 [[창덕궁]] 선원전 앞에서 결의[* [[영조]]는 아무리 자식인 사도세자가 미웠어도 그렇게 '''역적(逆敵)'''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아버지 숙종 어진 앞에서 "아바마마, 오늘 내 기필코 역적을 처단하고자 합니다."라고 말을 하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.]를 다지고, 세자의 '''피할 수 없는 [[임오화변|대처분]]'''을 [[1762년]](영조 38년) 윤5월 13일 기어코 감행했다. 영조는 세자를 쌀을 담는 '뒤주'에 가두기로 결심했을 때 "나의 꿈에 [[정성왕후]]가 나타나 '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.'고 [[예지몽|예지]](叡智)해 준 적이 있다"면서 적모(嫡母)인 정성왕후의 현몽과 생모 영빈의 밀고를 근거로 내세웠다. >임금이 [[창덕궁]]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[[폐서인|서인]](庶人)으로 삼고,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. >처음에 [[효장세자]](孝章世子)가 훙(薨)하여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(後嗣)가 없다가 >[[사도세자|세자]]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는데,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. >그러나 10여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, >[[대리청정|대리]](代理)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. >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(臣民)들이 낫기를 바랐었다. >정축년([[1757년]])과 무인년([[1758년]])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>병이 발작할 때에는 [[궁녀|궁비]](宮婢)와 [[환관|환시]](宦侍)를 죽이고,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. >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, 세자가 의구심으로 인하여 [[정신병|병]]이 심하게 되었다. >임금이 [[경희궁]]으로 이어하자 두 궁(宮) 사이에 점점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, >또 환관, 기녀와 함께 절도 없이 놀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 인사를 모두 폐하였으니, >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[[조선/왕사|후사]](後嗣)가 없었으므로 >임금이 매번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. >---- >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과 용포를 벗게 하고, >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, >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. >(중략) >세손([[정조(조선)|정조]])이 들어와 관(冠)과 포(袍)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, >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(金聖應) 부자(父子)에게 수위(守衛)하여 >세손이 또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. >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[[사도세자|동궁]]의 자결을 재촉하니, >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(春坊, 세자궁)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. >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[[폐서인|서인]]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. >(중략) >세자가 곡(哭)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[[개과천선]]하기를 청하였다. >금상(今上)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__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,__ >__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(誕生母) 이씨(李氏)로서 임금에게 밀고(密告)한 자였다.__ >도승지 이이장(李彛章)이 말하기를, >>"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[[영빈 이씨|한 여자]]의 말로 인해서 [[왕세자|국본]](國本)을 흔들려 하십니까?" >라고 하니, >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(邦刑)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. >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, 세손(정조)이 황급히 들어왔다. >임금이 빈궁([[혜경궁 홍씨]])과 [[정조(조선)|세손]] 및 여러 [[은언군|왕]][[은전군|손]]을 좌의정 '''[[홍봉한]]'''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, >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. >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99권, 영조 38년([[1762년]], 청 건륭(乾隆) 27년) 윤5월 13일 (을해) 2번째기사''' 이후 영조의 명으로 세손이 사도세자가 아닌 [[효장세자]]의 [[조선/왕사|승통]](承統)을 이을 것을 명하자 충격을 받고 슬퍼하였다. [[임오화변|아들의 죽음]] 이후 영빈은 "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(무덤)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"이라며 평생을 가슴앓이 했고 그 죄책감으로 손자인 정조를 지극 정성으로 대했다고 한다. 직접 아침저녁 반찬을 살펴 어린 세손이 이른 음식을 잡숫지 못하는데 할머니 정성에 억지로 자신다는 편지를 보고 [[혜경궁 홍씨|혜경궁]]이 안도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고. 그러나 정조는 생전에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. 어쨌든 어린 나이인 11살에 친할머니가 아버지를 죽여달라 간청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아버지를 생각하면 용서하기 어려웠던 듯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